3월 1일 주일 가정예배_우리의 평안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요한복음 14:27)

3월 1일 주일 가정예배_우리의 평안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4:27

❍ 우리의 평안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 요한복음 14:27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는 지금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바이러스 전파의 위험 때문에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초유의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주일성수를 철칙으로 생각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는 한이 있어도 주일 예배는 드려야 한다. 그렇습니다. 주일 예배는 소중한 것이고 상황과 여건에 따라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이러스 감염이 급속하게 퍼지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책임 있는 행동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희 교회도 교회에서 모여서 예배하지 않고 각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한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세상은 위험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 때문에 예배나 기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을 잠시 멈출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신 일이 있습니다. 유대인들, 특별히 바리새인들의 관점으로는 안식일을 어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리어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모여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 것만 주일을 성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도 주일을 성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하여 모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고통 받고 있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주일을 잘 지켰다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정부와 의료진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지 못합니다. 이 일에 끝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일의 끝을 아시는 주님께 구하십시다. 우리의 무기력함과 연약함을 고백하며 기도하십시다. “주여, 이 땅을 치유하소서. 주의 교회와 성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마가복음 강해는 잠시 멈추고 지난 주간 큐티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 한 가지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평안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평안하십니까?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에는 항상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또 하나 성도들의 마음에 항상 있어야 할 것이 평안입니다. 평안이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 평안이 없으면 그 무엇도 우리를 복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청년이 자신이 죽기 전에 꼭 소유하고 싶은 것을 노트에 적어 보았습니다. 건강, 지식, 명예, 사랑, 권력, 돈. 이런 목록을 적어서 자신이 존경하는 선생님에게 찾아갔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청년이 적어 온 목록을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게 자네가 여기 적어온 것들은 훌륭한 소원이야.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 그것이 없으면 자네의 소유는 오히려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될 걸세.”
청년은 자신이 무엇을 빠뜨렸는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청년이 쓴 목록에 줄을 그은 다음, 그 밑에 ‘마음의 평화’라고 써 주었습니다. 청년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건강, 지식, 명예, 사랑, 권력, 돈보다 마음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이 청년이 책을 하나 썼는데 책 제목이 <마음의 평화>였습니다. 이 책은 수백만 부가 팔렸고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이 바로 조슈아 리브먼입니다.

우리 중에 평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모든 사람이 평안을 원하지만 누구나 다 평안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평안을 원하지만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마음 안에 평안을 빼앗아 가는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근심과 두려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권력과 힘을 갖기를 원하지요. 그것으로 삶의 위기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근심과 두려움을 막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보험에 가입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고나 질병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돈과 힘으로는 근심과 두려움을 막지 못합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해줄 수는 있지만 평안까지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돈 많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아무 근심 없으시지요?” 권력자들에게 물어보세요. “아무 두려움 없으시지요?”

중국 청도에 가면 옛 독일 총독의 관저가 있다고 합니다. 청조 말기에 청도를 다스리던 총독이 머물러 살던 관저가 유적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총독 관저 1층은 몇 개의 방과 거실, 접견실, 회의실, 식당, 주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2층에는 총독의 침실과 서재 등이 있습니다. 몇몇 방문에는 그 방에서 잠을 자고 간 유명 인사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공산 혁명의 주인공인 모택동의 이름도 있다고 합니다. 모택동이 총독 관저에서 잠을 자고 갔다면 어디에서 잠을 잤겠습니까? 당연히 총독의 침실이 아니라 1층의 작은 문간방이었습니다. 암살자가 침입을 한다면 2층 총독의 침실을 노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스스로 문간방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암살이 두려워 문간방에서 잠을 자야 했다면 거기서는 다리를 뻗고 단잠을 잘 수 있었겠습니까? 모택동은 최고 권력자였지만 그 권력으로도 두려움은 막지 못했다는 겁니다. 낮에는 무소불위위의 권력을 휘두르지만 밤이 되면 두려움 때문에 잠을 설쳐야 하는 사람, 과연 이런 사람을 행복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처럼 돈으로 좋은 침대는 살 수 있으나 잠은 살 수 없습니다. 권력과 힘으로 사람은 통제하고 부릴 수 있지만 근심과 두려움은 통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으로도 안 되고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되는 것이 마음의 평안입니다. 그런데요. 예수님께서는 그 평안을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복음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절).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평안은 어려운 일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와 고통 제로의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평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평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주어진 상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기 얼마 전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예수님은 안 계시고 자신들만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진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남겨질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예수님을 죽인 세상입니다. 한 마디로 제자들에게 고난의 폭풍이 몰려오고 있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근심하고 두려워할 만한 상황인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황 속에서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정말 위대한 평안 아닌가요?

예수님께서는 평안이라는 주제의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이 말씀에 의하면 평안이라는 것은 돈이나 힘이나 보험 같은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은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말입니다.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요? 그래요. 예수님께서는 근심과 두려움에 대한 완벽한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니 그 완벽한 대책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작은 일에도 늘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세우신 대책이 무엇일까요? 죄인을 위하여 지신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누리게 되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새롭고 친밀한 관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마련하신 영원한 거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러저러한 대책을 세웁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세상의 그 어떤 대책도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죽음을 막지 못하는 한 그 어떤 대책도 미봉책에 불과한 것입니다.
요즘에 사람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것의 실체가 뭐죠? 바이러스나 감염증 자체가 아니라 사실은 그것이 가져오는 무서운 결과,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근심과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사실 죽음이라는 놈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죄와 죽음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완벽한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우리 영혼 깊은 곳에 박힌 죄와 죽음도 어찌할 수 없는 완벽한 대책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 용서와 의로움과 영생입니다. 여러분은 이 진리를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으니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는 평안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빼앗기지 않는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33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문제들, 사실은 예수님께서 다 이겨버리셨다는 겁니다.

평안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 속에 있는 게 아닙니다. 평안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오직 하나, 믿음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죄를 이기시고, 죽음을 이기시며, 세상을 이기신 분을 믿는 믿음입니다.

상황은 똑 같은데 우리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오면 근심과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이상하죠? 그런데 그게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모택동은 밤마다 불안한 잠을 청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서 근심하는 대신 찬송을 불렀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평안한 얼굴빛을 잃지 않았습니다. 모두 예수님이 주신 평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엄중한 위기 상황을 지나고 있습니다. 정부와 의료진이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 감사하십시다. 우리도 신중하게 대처하며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십시다.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위에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자신의 전부를 희생하셨습니다. 세상이 흔들 수 없는 평화와 평안을 주시기 위하여 치르신 대가, 그게 십자가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근심과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면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엄중한 위기 상황을 지나고 있습니다. 정부와 의료진이 최선을 다하고 있음에 감사하십시다. 우리도 신중하게 대처하며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십시다. 고통 받고 있는 이들을 위로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위에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임하기기를 축 복합니다.

<합심기도>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절).
아멘입니다. 주님, 우리의 무기력함을 인정합니다. 주님을 신뢰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평안을 누리며 살게하여 주소서. 이 나라를 덮고 있는 근심과 두려움이 떠나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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