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태복음 6:9-13)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마태복음 6:9-13

○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 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헤밍웨이의 소설 <세속의 신전>이라는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아버지는 신문에 이런 광고를 냈습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약속한 시간에 호텔에 나갔을 때 무려 800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들려주는 것은 스페인에서 파코라는 이름이 얼마나 흔한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용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당신의 죄를 고백하라>는 책에서 영국의 정신병원 의사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병원 환자들이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갖기만 한다면, 나는 내일이라도 당장 그 환자들 중에 반을 사회로 돌려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거죠. 그런데 일용할 양식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절박한 필요가 있으니 그게 바로 용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12절).
우리의 기도에서 꼭 빠지면 안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용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영원히 용서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결코 정죄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죄를 사해달라는 기도가 필요할까요? 물론입니다.

우리에게 용서가 필요한 까닭은 우리가 실제로 죄를 짓기 때문이고,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다른 집 아이가 잘못하는 것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내 자식이 똑 같은 잘못을 할 때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상합니다. 내 자식이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죄를 짓는 것도 안타까워하시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를 지을 때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속상해 하신다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에서 실패하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멀어졌던 관계를 회복하고,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와 용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그런 평가를 받은 것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유부녀를 간음하고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을 죽게 만든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죄로 인하여 삶에 끊이지 않는 고통거리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사죄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사죄를 구하는 기도 시입니다. 그 중의 일부분입니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죄로 인하여 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녹아 있는 기도인 거죠. 이런 기도가 있었기에 죄로 무너진 삶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구할 때 한 가지 고려할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앞부분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을 붙이셨습니다. 14절과 15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시라.”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이해하면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만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씀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조건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나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면 그런 생각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선행과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나라 들어갈 수 없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결론이고,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산상수훈의 결론입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준 것으로 하나님께 용서 받고 받아들여질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죄가 작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죄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셨나요? 그 정도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 용서해 주시면 괜찮겠습니까? 그 정도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에 충분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예수님께서 왜 그토록 무거운 십자가를 지셔야 했을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불가한 생각이라는 것이 금방 깨달아집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의 어떠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에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을 붙이신 것일까요? 저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라고 깨달아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구할 때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고 고백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 내버려 둔 채 그렇게 기도하기 어렵습니다. 그 사람 용서하든지 아니면 기도하기를 그만두든지 둘 중에 하나만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를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결국은 용서하게 하시려고 이 말씀 넣어놓으신 거라 깨달아졌어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를 받았고 또 용서 받기를 원하면서도 자신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지만 그 사람의 죄는 용서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없지만 실제로는 그런 태도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선이고 은혜를 모르는 태도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에 관한 비유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5조에서 6조 정도 되는 금액입니다. 10조가 넘는다는 계산법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금액이든지 개인이 갚을 수 없는 빚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종이 갚을 것이 없다고 하자 자비로운 임금은 빚을 완전히 탕감해 주었습니다.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납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이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게 되죠. 지금 가치로 말하자만 천만 원이 안 되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이 노하여 빚을 다 갚을 때가지 감옥에 가두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임금이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에게 왜 그렇게 노하였던 것일까요? 그는 마치 은혜를 받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게 뭔가요?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사족처럼 보이는 기도이지만 은혜를 아는 자로 살라. 사랑과 은혜의 유통자로 살라는 하나님의 배려가 녹아 있는 기도인 것입니다.

일본에 안경달 선교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원래는 학교 교장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는 어릴 때 형이 일본 사람에게 맞아 죽는 것을 본 후에 일본 사람들을 평생 증오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 영적인 눈이 열렸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에게 지은 죄가 크냐? 일본 사람이 네게 지은 죄가 크냐?” “제가 주님께 지은 죄가 큽니다!” 주님께 대답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독생자도 주었거늘 너는 왜 일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느냐?” 이 말씀에 그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일본 사람들을 미워했던 것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교직을 떠나 일본 선교사로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는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용서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어요. 용서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삶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용서하지 않고 미움과 증오를 그대로 품고 사는 것은 독을 품고 사는 것과 똑 같은 일입니다.
중국 속담에 “복수하기로 마음먹는 자는 무덤을 두 개나 파는 격이다”는 말이 있다고 해요. 사람이 돈이 없어서 죽는 게 아닙니다. 마음에 미움과 증오라는 독을 품고 살기 때문에 삶을 망치고 죽게 되는 겁니다.

세상에 자기 자식이 독을 품고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용서하라는 말씀이 때로는 부담스럽게, 때로는 가혹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우리를 살리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고통 속에서 자유를 주시려는 말씀인 겁니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겪었습니다. 못된 형들 때문에 삶이 엉킨 실타래처럼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애굽 사람의 노예가 되고 그것도 모자라 죄수가 되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비정한 형들을 향해서 독기를 품고 살만한 상황이었던 거죠. 그러나 그는 미움과 증오가 삶을 망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용서라는 해독제가 있었어요.

요셉은 애굽 땅에서 첫째 아들을 낳고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습니다. 므낫세라는 이름은 자기의 고백을 담은 이름이었습니다.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창 41:51).
여러분은 상처와 고통이 잘 잊어버려지시나요? 잊고 싶어도 잊어지지 않는 게 상처와 고통, 그리고 그것을 안겨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떻게 그것을 잊을 수 있었는가? 용서로 잊은 겁니다. 용서로 므낫세 한 거예요. 그랬기 때문에 상처와 고통에 묶이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기도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 또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이 기도를 드린다면 누군가는 또 나를 생각하면서 이 기도를 드릴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나 자신도 다른 사람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의식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피해를 입었다. 고통을 당했다. 상처를 받았다.” 정말 우리는 당하고만 살았나요? 그렇지 않아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안겨 주며 살아 왔습니다.

예전에 목회자들끼리 수련회를 가서 서로에게 좋은 점과 고쳐야 할 점을 코멘트 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누가했는지 모르게 종이에 적어서 그렇게 하도록 했습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쓴 글을 읽고 있는데 제가 한 말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저에게 상처를 받았다. 그게 사실이었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람들 앞에서도 죄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을 불신하는 근본적인 죄도 있지만 혼자 짓는 죄 없습니다. 대부분의 죄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 속에서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용서 못한다. 용서하지 않겠다.” 우리가 쉽게 내뱉는 말이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무서운 말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용서를 거절하겠다는 뜻이고, 더 깊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인가 큰 아이와 둘째 아이가 심하게 다투는 일이 있었습니다. 서로를 찌르는 날카로운 말들이 오고갔습니다. 그것을 듣고 있는데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평소에는 훈계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 했는데, 그날은 아이들을 붙잡고 그냥 울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를 요구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제 모습을 보고 우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잘못했어요.” 용서를 빌었습니다. 왜 그랬던 것일까? 아이들이 아빠의 마음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싶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죄를 지은 우리를 붙잡고 우셨습니다. 우리를 때리는 대신 자신이 맞으셨습니다. 죄인을 심판하는 대신 죄인으로 심판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그 은혜와 사랑이 강물과 같이 흐르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에게로, 그리고 나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또한 다른 사람에게서 나에게로. 하나님의 은혜가 온통 우리의 삶과 우리 공동체와 이 세상을 둘러싸기를 원하신다는 거죠. 그와 같은 하나님의 소원을 담은 기도가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기도예요.

용서는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용서라는 은혜의 물줄기는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겁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은혜의 물줄기를 가로막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그 결단이 분명하다면 용서할 수 있어요.

미국에 조엘 소넨버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조엘>이라는 책으로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1979년, 그가 생후 20개월 쯤 되었을 때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40톤 트럭이 그의 가족이 탄 승용차를 덮치면서 불이 나는 바람에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 시커먼 숯덩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무려 50여 차례가 넘는 수술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화상보다 더한 고통은 그를 괴물처럼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편견이었습니다. 수많은 성형수술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마치 괴물가면을 뒤집어 쓴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장애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발가락과 손가락이 없지만 축구선수와 농구선수로 활약했으며 고등학생 때에는 전교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솔직한 태도와 밝은 성격 덕분에 어디를 가든지 리더가 되었습니다. 그는 지금 미국 전역에서 매우 인기 있는 강연가이며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인 빌리 그래함 목사 앞에서 연설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교통사고가 난 지 18년 만에 잡힌 가해 운전자를 법정에서 용서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한이 없다는 것을 당신이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 저는 증오심으로 인생을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증오가 또 다른 고통을 낳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사랑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무한한 사랑으로 둘러싸일 것입니다.”

지금은 불완전하여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이지만 언젠가는 용서가 필요 없는 세상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하여 더 이상 용서가 필요 없는 세상,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가져오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바라보며 이제 미움과 증오를 거절하고 대신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으로 둘러싸입시다. 용서 받았으니 용서 하십시다. 용서 받기 위하여 용서하십시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오고 있음을 삶으로 전하기를 바랍니다.

제임스 패커 교수님이 쓰신 기도문을 읽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님, 당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분은 당신뿐입니다.
다른 이의 잘못을 되새기고,
이전의 상처를 담아두면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당신의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타는 불빛 속에서 당신의 십자가는 드러납니다.
우리가 희미하게 알았던 진리를,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 빚이 얼마나 작은지를,
당신에게 진 우리의 빚이 얼마나 큰지를.

주님, 우리 영혼 깊숙한 곳에 있는 것들을 씻어주소서.
분노를 멈추라고 명하소서.
그러면 하나님과 화해한
우리의 삶은 당신의 평안을 널리 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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