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마태복음 6:9-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마태복음 6:9-13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 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2011년에 일본에서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가 발생하고 원전 사고가 일어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쓰나미에 도시가 쓸려 나가고 수천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을 때 일본에서 목회하시는 이용규 목사님께서 한국에 나와 계셨습니다. 일본을 사랑하는 분이셨기 때문에 재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급히 그 땅으로 돌아가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일본으로 돌아가신다니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기도 모임에서 말씀을 전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들어갑니다. 지금 전 세계가 일본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히려 여러분이 걱정됩니다. 매일매일 기도 없이 살아가도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여러분이 걱정됩니다.”

맞습니다. 위기처럼 보여도 기도하고 있다면 안전한 곳에 있는 것이고, 만사가 편안한 것처럼 보여도 기도 없이 살고 있다면 그게 위기인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위기 속에서 살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 아버지께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기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죄에 빠진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진실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면 실패의 자리에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신다는 거죠.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마지막 부분을 보면 하나님의 계획은 더 적극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지은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고 회복되는 것뿐만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것처럼 성경에 나와 있는 시험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련, 연단, 훈련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시험(Test)과 또 하나는 유혹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시험(Temptation)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시험하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하신 시험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목적은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고 우리의 믿음을 성숙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항상 시험은 어렵지만 그것을 통과하면 우리 영혼에 항상 유익함이 온다는 겁니다.

반면에 야고보서 1:13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죄를 짓도록 유혹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를 놓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연단과 훈련이라는 의미로 시험하실 수는 있지만, 절대로 유혹이라는 의미에서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거죠.

본문 말씀에 우리말로 시험이라고 번역된 단어를 대부분의 영어성경에서는 유혹(Temptatio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의미를 조금 더 명확하게 하자면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되는 거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가 필요한 것은 우리를 시험하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누구죠? 바로 마귀입니다. 13절 뒷부분에 보면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기도가 나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일반적인 악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구해달라는 기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도 동일하게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나오는데 거기에는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기도가 나오지 않아요. 마태복음이 무엇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인가? 유혹이라는 시험이 악에 속한 것이고 악한 자, 마귀로부터 온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귀는 보이지 않지만 영적 실체입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악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넘쳐나는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 자신에게 책임이 있지요. 그러나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궁극적인 이유는 마귀가 공중 권세 잡은 자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존재하는 한 시험도 존재합니다. 시험이 없었던 시대도 없고 시험이 없는 지역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인도에 혼자 떨어져 산다고 해도 시험이 찾아올까?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시험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다시 말해서 시험에 굴복하지 않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8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이런 경고가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영적인 형편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말씀입니다. 영적인 형편이 이러함에도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신은 영적인 안전지대에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마귀가 나를 시험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정말 우리가 안전지대에 살고 있나요?

마귀의 시험이 실제라면 마귀가 우리를 어떤 방법으로 시험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시험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것과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마귀가 사용하는 시험의 재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욕구, 관계, 그리도 육체까지. 심지어는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들조차 얼마든지 마귀가 사용하는 시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마귀에게 세 가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먹는 것, 육체적인 필요를 이용해서 시험했다는 거죠. 두 번째 시험은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지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도 시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시험은 나에게 절하고 천하만국의 영광을 얻으라는 시험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네 것이다. 성공과 부와 영광을 얻으라.” 이런 것을 가지고도 시험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마귀가 어떤 도구를 사용해서 우리를 시험하는가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과 도구들을 사용하지만 결국 목적하는 바가 있다는 거죠.

좀 전에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시험(Test)하실 수 있다고 말씀드렸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목적은 하나님 자신과 우리를 더 가깝고 친밀한 관계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 가운데 견고하게 세우시기 위함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그가 시험을 통과하였을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1:12)였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시험과는 정반대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궁극적은 목적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 떠나도록 만들기 위함이에요.
예수님께서는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악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19).
악이 뭐죠?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이라는 겁니다.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악과 고통은 한 묶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이 왜 고통스럽고 불행한 것인가?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시험을 통하여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우리의 삶에 고난이 찾아 올 때가 있습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시험인가 아니면 마귀의 유혹인가? 성경은 고난이 시험의 재료로도 사용될 수 있고 유혹의 재료로도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욥의 경우를 보면 이 두 가지가 고난이라는 한 사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난이라는 문제와 현상만 보면 이것이 하나님의 시험인지 마귀의 유혹인지 분별하기가 어려울 수 있어요. 시험과 유혹을 분별하는 기준은 그겁니다. 고난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고 있는가 아니면 멀어지고 있는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마귀의 존재도 실재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 떠나도록 만드는 시험도 실제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마귀의 시험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힘으로는 악한 자와 그의 시험에 맞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사람으로 지음을 받았던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과 같이 되라는 마귀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일컬어지는 베드로는 또 어떤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할 시점이 점점 가까이 왔을 때 베드로에게 몇 번이고 경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눅 22:31).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막 14:30).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 14:38).
마귀의 강력한 시험 있을 것이고 그리고 그 시험의 성격이 무엇인지, 그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말씀해 주신 겁니다. 그때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아십니까?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제가 알기로 그 고백은 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몰랐던 게 있습니다. 자신에게 그 고백을 지켜낼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부인하는 죄를 짓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시험에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넘어질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나는 돈에 매여 살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나는 성적인 문제에서 자유를 얻었다. 나는 어떤 문제가 와도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을 수준은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직도 자신을 모르는 겁니다. 제일 교만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자신을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제일 약한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자신을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어떤 여자 분이 이성과 거리낌 없이 교제를 했습니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남녀사이의 이성적인 관계가 아니다. 자신은 선을 잘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 순간에 그 선은 사라지고 말았고 남편과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시험 앞에서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결심해도 선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도움과 보호를 구하는 기도가 필요한 겁니다.

지금 우리가 가운데 기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주님, 저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세상의 악에서, 악한 자에게서 저를 구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더 적어요. 기도가 어렵다. 바쁘다. 피곤하다. 훈련을 받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도우시고 보호하시는 은혜가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강하고 그에 비해 우리 자신의 저항력은 너무나 약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기도의 동기가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귀보다 하나님께서 강하시다는 사실입니다. 마귀의 시험도 끈질기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비교할 수 없이 끈질기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 악에서 구해주시도록 기도하라고만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마귀의 권세를 꺾으셨습니다. 창세기 3:15 예언에 의하면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마귀의 머리를 짓밟으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예수님께서 공중 권세 잡은 자의 통치를 끝장내시고 세상에서 모든 악과 불의를 몰아내실 때가 올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기도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시험이 있을 거라는 경고를 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눅 22:31).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아마 이 말씀이 없었다면 아마 베드로는 영원히 믿음에서 떨어져 나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엄청난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중보하시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중보하시는 사역과 기도 없이는 마귀의 시험을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위한 기도를 결코 멈추지 않으실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악한 자에서 보호하시며 시험에서 건져 내실 것입니다.

믿음이란 연약한 자신에 대한 신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께 기대는 것입니다. 기도란 예수님께 기대어 하나님 아버지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타임지가 가장 위대한 선교사라고 말했던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분의 자서전 <순례자의 노래>에 보면 인도의 현지인들 속에 결점이 보이더라도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영접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붙들었던 성경구절이 있었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들, 비틀거리는 사람들, 죄인들을 다그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들을 패배가 아닌 승리로, 결점이 아닌 완전함으로 이끄시고, 기어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 같은 우리를 꺾지 않으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꺼져가는 심지 같은 우리를 끄지 않으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말입니다.

존 리펀이라는 분은 시련 또는 시험 속에 나타나는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깊은 물 만 날 때 내 너를 가게 하리니
고통의 강물이 덮치치 못하네
내가 너와 함께하므로 시련도 축복이라
그 깊은 고난이 널 정하게 하리라

불같은 시험 지날 때 네 길을 내리니
내 은혜 넉넉히 네 소원 채우리
불꽃이 너희를 사르지 못하니
내 뜻은 한 가지, 찌꺼기 태워서 정금을 내리라

예수께 기대니 내 영혼 평안해
원수에 무릎 꿇고 굴복치 않겠네
지옥은 힘 다해 내 영혼 흔들려 애쓰나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영혼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실 예수님께 기대십시다. 그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구합시다. “주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주여, 원수 앞에 무릎 꿇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시험에서 승리하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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