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모하는 공동체(사도행전 2:44-47)

우리가 사모하는 공동체
사도행전 2:44-47

○ 우리가 사모하는 공동체 / 사도행전 2:42-47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러분은 교회, 하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속회, 하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축복이다.” 그런 느낌을 가지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교회 공동체 속에서 상처와 아픔을 경험한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마음 아픈 장례를 섬겼던 적이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자매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교구목회를 하고 있을 때인데, 자매의 부모님이 장례를 섬겨줄 수 있는지 아주 어렵게 연락을 해 오셨습니다. 교회의 교우라면 장례를 섬겨드리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부탁을 하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교회에 등록을 하긴 하셨지만 새가족 양육을 받지 않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서 제적 되신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교회 예배에는 계속 나오고 계셨어요. 엄격하게 말하면 제가 섬기던 그 교회의 교인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런 상황을 본인도 알고 계시니까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장례를 섬겨달라는 부탁을 하기가 쉽지 않았던 거지요.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전에 공동체에서 큰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어서 다시 그런 일을 겪을까봐 공동체에 속하고 싶지 않았던 거였습니다.

교회로 모여서 불편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상처를 받는 일들이 많아요. 이런 일을 겪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공동체가 꼭 필요한 것인가.’ ‘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도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요즘은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복음과 공동체를, 신앙생활과 공동체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시고 사도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되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된 결과 그 열매가 무엇인가. 특별하고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생겼다는 거예요.
사도들이 의도적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복음을 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듣고 회심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고, 특별한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겁니다. 그들에게 모임은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힘썼다는 것은 노력했다는 뜻이 아니라 즐거워했다는 뜻이에요.

사도 시대에만 이런 일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항상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복음이 강력하게 전파되고 성령의 역사가 강할수록 더 강력한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복음이 전파될 때 왜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일까요? 복음이 가진 속성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하는 일을 이해하면 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공동체가 세워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죄는 단순히 거짓말이나 살인 같은 윤리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죄의 뿌리는 교만이고 자기중심성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내가 왕이 되고자 하는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놓는 죄는 관계를 파괴하고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지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자 연쇄적으로 다른 관계들이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온전히 하나 되었던 부부 관계에 틈이 벌어지고 서로를 탓하기 시작했고요. 시기심과 질투심 때문에 형이 아우를 죽이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죄는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관계의 단절과 고립을 낳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으로 그 죄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해 보세요. 구원은 닫혀 있었던 관계와 교제의 문이 열리는 것을 말해요. 하나님을 향하여, 다른 사람을 향하여,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하여. 진정한 교제와 하나 됨에 대한 열망을 갖게 만드는 것이 복음이고 구원입니다. 그 갈망이 사람들을 모이도록 만들고,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 교제하게 만드는 겁니다.

거듭난 사람들 안에는 누구 할 것 없이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진정한 공동체에 속하고 싶다. 그런 갈망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주신 갈망이지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런 갈망을 주시는 이유가 있는 거예요. 복음을 구체적으로 경험하고 누릴 수 있는 곳이 바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지식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핵심은 사랑이고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게 뭐지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에요. 그런데 그 사랑이 경험되어지는 곳이 바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배하고 기도만 한 게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떡을 떼며 서로 교제하는 공동체였습니다. 본문 말씀에 사랑이라는 단어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위기를 보면 사랑으로 충만한 공동체였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기쁨으로 교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어떤 것보다도 놀라운 축복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공동체가 아니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품이고, 복음의 핵심인 사랑을 어디서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갈등과 상처가 두려워서 공동체를 멀리합니다.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거예요. 공동체가 없이는 복음적인 사랑을 경험할 기회도 잃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다윗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맛보아 알고 있나요?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보고 십자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나기도 하는 거죠.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통로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세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디에, 어떻게 나타나신다는 건가요?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깊이 사랑할 때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프랑스 떼제공동체에서 즐겨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사랑의 교제와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도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확신이 들수록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유무상통의 삶을 살았습니다. 44, 45절 말씀을 보면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탐욕과 욕심을 내려놓고 경제적인 자원을 공유했다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벽이 있습니다. 인종의 벽이 존재하고 남녀의 벽이 존재합니다. 학벌이라는 벽도 존재하고 경제력이라는 벽도 존재합니다. 우리가 개방된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이런 벽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습니다. 노는 물이 다르다고 하지요?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함께 어울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공동체에서는 이 벽이 허물어졌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어울려 하나님을 예배하고 서로 떡을 떼며 차별 없이 교제했습니다. 심지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차이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두 말할 것도 없이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3).
죄는 사람들 사이에 벽을 쌓게 만들고 온갖 차별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벽과 차별을 허물어 버리고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의 능력이 실제로 나타나고 경험되어지는 곳이 바로 믿음의 공동체였던 거예요.

제가 몇 년 전에 교우들과 함께 국내성지순례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교회를 방문했었습니다. 선교 초기에 지어진 ‘ㄱ자’ 예배당(남녀를 구분해서 앉게 하기 위해)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는 오래된 예배당보다 더 아름다운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했던 조덕삼이라는 분과 이자익이라는 분의 이야기입니다. 조덕삼은 마을의 유지였고 이자익은 그 집에서 일하는 머슴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테이트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가 부흥하자 장로 투표를 하게 되는데 머슴인 이자익은 장로가 되고 주인인 조덕삼은 장로에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양반과 상놈, 주인과 종이라는 신분제도가 남아 있었던 터라 사람들 사이에는 술렁거림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갈라지는 거 아닌가 그런 위기감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분위기를 감지한 조덕삼이 선교사에게 발언권을 얻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 선출된 이자익 장로를 잘 받들고 금산교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조덕삼은 자신의 말대로 교회와 이자익 장로를 잘 섬겼습니다. 조덕삼은 이자익이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공부를 하도록 후원하였고 목사가 되자 금산교회에 담임목사로 모시게 되요. 그가 죽기 전에 가족들에게 유언으로 남긴 말도 교회와 목사님을 잘 섬기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천국이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봅니다. 천국에도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학대하는 일이 있을까? 천국에도 남존여비라는 말이 존재할까? 천국에도 주인과 노예가 있을까? 천국에도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분이 있을까? 가진 자는 더 가지려 하고 없는 자는 주려 죽는 일이 있을까? 당연히 없을 거라고 생각하죠. 공평과 정의, 그리고 사랑이 충만한 나라가 성경이 말하는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천국의 모형입니다. 완벽하지도 않고 충분하지도 않을 것이지만 천국을 미리 맛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천국의 속성을 전혀 맛볼 수 없다면 우리가 바라는 천국은 실체가 없는 것 아닌가요? 단지 환상에 불과한 것 아니겠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공동체 안에서 복음이 복음인 것을 경험했습니다. 천국의 속성을 맛보고 누렸어요. 그 결과가 무엇인지 47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절).
첫 번째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로 인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날마다 더해졌다는 거예요.

사도 시대에 복음이 얼마나 빠르고 폭넓게 확장되었는지 모릅니다. 마치 불이 번지는 것처럼 복음이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좋은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온갖 핍박과 저항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성령의 역사와 사도들의 능력 있는 설교, 거기에 한 가지 더 복음적인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다른 공동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공동체!” 그것이 복음 전파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던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는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통로입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아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거룩하고 사랑으로 하나 되기만 하면 복음 전파의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초대교회와 같은가 생각해 봅니다.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일 겁니다. 그 차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공동체를 떠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공동체로 모일 이유보다 공동체를 떠날 이유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공동체로 모이고 교제하는 것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갈등과 상처가 있지만 사랑하기를 포기하면 안 됩니다. 개인의 삶을 제외하고 복음이 복음인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공동체를 포기한다는 것은, 복음을 통해서 누리를 수 있는 축복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딸이 셋인데 심심치 않게 서로 싸울 때가 있습니다. 피를 나눈 자매 사이에도 갈등과 다툼이 있다는 거죠. 그렇다고 저는 둘 사이를 격리시키지 않습니다. 집을 나가라고 하지 않아요. 조금 있으면 다시 웃고 장난치고 그럴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다툴 때 그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 아이들이 갈등 속에서도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것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문제와 갈등이 있다고 공동체를 멀리하면 사랑으로 하나 되는 축복을 누릴 기회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공동체의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갈등이 있더라도 사랑으로 하나 되는 법을 배워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공동체의 축복으로부터 제외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우리가 과연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요? 천국 같은 공동체가 우리에게 가능한 일일까요? 물론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믿었던 예수님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에요. 사도 시대에 역사하셨던 성령님과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우리의 믿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하나 될 수 있다고 믿는가? 천국 같은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가? 그리고 그 믿음에 합당한 순종을 드릴 태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가득한 세상 속에 육신의 몸을 입고 찾아오셨습니다. 이기심과 갈등이 가득한 세상에 들어오셔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여기 있는 거죠.
공동체 속으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상처 받을 용기가 필요하고 그럼에도 사랑하겠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누가 그런 용기를 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을 믿는 사람, 주님께서 가져오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믿는 사람들일 거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이 사랑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천국 같은 공동체를 세워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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