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 7:15-20)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태복음 7:15-20

○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 마태복음 7:15-20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프랑스의 모파상이 쓴 <목걸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마틸드라는 여인이 어느 날 장관이 주최하는 무도회에 초대되었습니다. 가난한 그녀에게는 무도회에 입고 갈 변변한 옷도 없었고 장신구도 없었습니다. 남편의 배려로 어렵사리 외출복은 구입했지만 문제는 장신구. 그녀는 친구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빌려서 무도회에 가게 됩니다.
무도회에 참여하여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집에 돌아와서 목걸이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백방으로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잃어버린 목걸이와 비슷한 목걸이를 구해서 친구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부부는 목걸이를 구입하기 위해 큰 빚을 졌기 때문에 그때부터 빚을 갚기 위한 고통의 날이 시작되었습니다.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결국 10년 만에 빚을 다 갚게 되었습니다.
마틸드는 어느 날 산책을 나갔다가 목걸이를 빌려주었던 친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변한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란 친구는 어찌된 사연이냐고 물었고 그녀는 진실을 이야기해 줬습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배상해 주기 위해 큰 빚을 지게 되었고 지난 십 년 동안 밑바닥 생활을 하며 돈을 갚았다고. 친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았습니다. “어쩜, 어떡하면 좋아, 가엾은 마틸드, 그건 가짜 목걸이였어. 기껏해야 500프랑밖에 나가지 않는 거였다고…”

우리 주변에는 항상 가짜가 있습니다. 가짜라고 공공연히 알려진 것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마틸드처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가짜들도 문제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정말 주의하고 경계해야할 가짜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15절).
거짓 선지자들은 잘 못된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거짓 교사 또는 일반적으로 이단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앞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논리적으로 좀 뜬금없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첫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고요. 또 한 가지는 좁은 문을 찾고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 방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인 것이죠.

마틸드는 가짜 목걸이 때문에 10년 동안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했습니다. 억울한 일이죠.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을 당하는 것은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가 넓은 문으로 들어갈 것인가? 이것은 무엇이 더 좋으냐의 선택이 아니라 생명인가 멸망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은 곧 영혼이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문제라는 거죠.

성경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가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를 박해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들까지 사랑하고 포용하라는 말씀이죠.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라고 말씀해요. 유다서 1장에 보면 그들과 “힘써 싸우라”는 말씀이 있고, 디도서에서 보면 “그들의 입을 막으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문제를 얼마나 엄중히 보고 계시는지 알 수 있는 말씀들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어떤 교회는 칭찬을 받았고 어떤 교회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칭찬하시거나 책망을 하신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교회를 지켜낸 교회들은 칭찬을 받았다고 그렇지 못한 교회들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칭찬을 받은 이유가 뭐죠? 니골라당의 거짓된 교훈으로부터 교회를 지켜냈기 때문입니다. 두아디라교회가 왜 책망을 받았나요? 이세벨의 교훈을 용납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잠시 이단에 빠졌다가 나오신 분과 잠시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단인 줄 모르고 갔다가 나중에야 알게 되셨다고 합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자신이 이단에 빠졌는데도 자신을 붙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자신들을 붙들어주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몹시 서운하고 원망이 배어있는 것처럼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돌볼 1차적인 책임은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낼 뿐만 아니라 형제들과 교회를 지켜내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 선지자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가려내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본질은 양을 도둑질하는 이린데 양의 옷을 입고 나올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가짜는 항상 자신의 정체성을 숨깁니다. 자신이 가짜라고 광고하는 법이 없습니다. 신천지와 하나님의교회, 명백한 이단이죠. 그런데 결코 자신들을 이단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자료를 보니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들이 진짜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뒤에 나오는 말씀을 보면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권능을 행했다는 말씀도 있어요.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할만한 어떤 일들이 나타난다는 거죠. 그러니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분별하는 것이 어려운 면이 있을 것이지만 불가능하지 않다고 하셨어요. 그들의 열매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16-17절).
열매는 드러나는 것이고 나무는 본질을 말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아무리 자신을 위장한다 할지라도 결국 본질은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열매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첫째는 그들의 가르침입니다.
진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면 아무리 그것이 유사해 보일지라도 그것이 진리일 수 없습니다. 이단이 왜 이단이라고 불리지는 아세요? 그들의 가르침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를 이 끝 단. 처음에는 가는 길이 비슷해 보이지만 결국은 다른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진리가 아닌 다른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이 수 없이 많지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이단들도 있고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이단들도 있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율법주의라는 이단도 있습니다. 무엇을 믿어도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삼가라고 말씀하신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넓은 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길을 걸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람들을 넓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가르친다는 겁니다. 편하고 쉬운 길을 가르친다는 거죠.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말라고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부인하지 않아요. 주님을 믿으라고 말해요.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에는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그리고 회개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는 거의 없습니다. 구원의 축복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심판에 대한 경고나 지옥에 대한 메시지는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실 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을 믿으려면 회개가 필요하다는 말씀이죠. 요즘 금요성령집회에서 회개를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제가 메시지를 잘 전하고 있다면 듣기가 좀 불편하실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회개라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불편하고, 못 되고, 더러운 진실과 마주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회개 없는 믿음을 가르치려고 한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그런 메시지를 싫어하니까 그렇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에게 복음은 결코 편안한 메시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옛 사람에게는 죽음의 메시지입니다. 복음은 자기 만족과 노력과 자기 신뢰와 영광에 죽음을 선고합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에는 그런 좁은 길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육신의 마음에 걸리거나 찔리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죄악으로 달려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이 예레미야를 비난하며 뭐라고 예언했는지 아십니까?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너희에게 재앙이 임하지 아니하리라”(렘 23:17).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 염려하지 말라. 이대로 계속 가도 좋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거다.” 그런 뜻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안타깝지만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좋게 여기고 그들이 제시하는 길을 따랐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들은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렸고 나라가 망하는 수치와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설교자를 선호하십니까? 마음의 불편함이나 찔림이 전혀 없이 평안과 위로만을 전하는 설교자는 가짜입니다. 그들의 메시지를 삼가셔야 합니다. 만약 제가 여러분에게 그런 메시지만을 전하고 있다면 저는 가짜고 여러분은 제가 전하는 메시지를 거부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함께 멸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것은 두 번째로 삶이라는 열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본질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만 나쁜 나무가 좋은 나무로 본질이 바뀐 거죠. 그런데 정말 나무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겉으로 드러나는 삶이라는 열매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 삶이 변화되셨나요? 성품이나 삶의 영역에서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면 거듭난 게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마귀와 세상에 뿌리를 박고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의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의 삶이 똑 같다? 복음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노력하는 사람일까?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성령께서 마음에 임하신 사람. 성령의 다스리심을 받고 있는 사람만이 이와 같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의 인격과 삶에는 이와 같은 열매가 나타나지 않아요. 경건을 말할 수는 있지만 결국 그들이 삶 가운데 드러내는 열매는 육체의 열매들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좋은 나무로 본질이 바뀐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2:19-21).

가르치는 것과 삶이 완전히 일치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은 불완전하기 때문이죠. 그것이 저에게도 갈등과 걸림이 됩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가 부족한 것과 나쁜 열매를 맺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제가 무엇을 이야기하든지 제 삶에 육체의 열매들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저를 가짜로 여기셔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이단들이 있습니다. 교세가 대단한 이단들도 있죠. 교주나 목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 관하여 드러나는 사실을 보면 성적인 타락과 도덕적인 타락이라는 열매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곳이 하나님이 아니고 세상이고,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들만 그런 열매를 맺는 게 아닙니다. 자신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똑 같은 열매를 맺게 만들어요.

제가 예전에 이단에 대한 강의를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강의하시는 목사님이 예를 하다 들어주셨습니다. 어떤 분의 딸이 신천지에 빠지더니 삶이 확 변하더래요. 좋은 쪽으로 변화된 것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변화되더랍니다. 거짓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엄마가 보기에 숨 쉬는 것 빼놓고 다 거짓말이더라는 겁니다.
실제로 신천지에서는 모략이라는 이름으로 거짓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좋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짓의 아비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항상 우리를 경건함과 거룩함으로 이끕니다. 진실함과 신실함이라는 열매를 맺게 만듭니다. 그런데 어떤 가르침이 우리를 부도덕함이나 방종으로 이끈다면 그것은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분명하게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진리를 따르고자 하는 갈망이 있는가 하는 거예요.

왜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에 미혹을 당할까? 첫 번째는 진리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몰라요. 진짜를 잘 모르니 거짓 가르침에 속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는데 소홀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또 한 가지 이유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안에 육신의 욕망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걸이>의 주인공 마틸드는 가짜 목걸이 때문에 인생을 허비하고 망쳤습니다. 그런데 왜 그녀에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 목걸이를 잃어버렸기 때문일까? 친구가 빌려준 그 목걸이가 가짜였기 때문일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그 모든 일의 출발점이 마틸드의 마음속에 있었다고 해요. 목걸이를 빌리기 전에 마틸드의 마음은 이런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외출복도 장신구도 없었으며, 뭐 하나 제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온통 그런 것들이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 사람들이 선망하는 존재가 되는 것, 세간에 화제의 대상이 되는 것. 이것이 그녀의 간절한 염원이었다.”

문제가 뭐였죠? 그녀의 마음속에 있었던 허영심이었습니다. 화려함을 추구하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 결국은 그것이 가짜에 삶을 내던지도록 만들었던 겁니다. 모파상이 <목걸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야고보서 우리가 시험에 유혹을 받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됨이니”(약 1:3).
우리가 가짜에 끌리고 속는 것은 우리 안에 가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는 것은 우리 안에 거짓 선지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아프게 하는 말씀도 들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육신을 즐겁게 하는 사탕발림 설교에 속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만족과 영광에 대하여 죽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신가요? 오늘 예배를 드리러 오실 때 죽으러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자아를 만족시키는 다른 복음에 속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육체의 소욕을 부인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마음이 있습니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십자가에 못 박을 마음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육신의 욕망을 부추기는 허영된 가르침에 속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고 경건한 살고자 하는 갈망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삶으로 이끄는 타락한 가르침에 속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필요로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일부분이 아니라 내 인격과 삶을 전체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욕망을 부인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진리 위에 서 있다면 그 어떤 세력도, 그 어떤 가르침도 우리를 흔들어 놓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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