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는다면 비판하지 말라(마태복음 7:1-6)

사랑하지 않는다면 비판하지 말라
마태복음 7:1-6

○ 사랑하지 않는다면 비판하지 말라 / 마태복음 7:1-6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우리가 잘 아는 찬양 중에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와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임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와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여러분은 형제와 자매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실 때 혼자 신앙생활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를 공동체 안으로 부르시고 서로 교제하며 사랑하게 하셨습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주기도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주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가 아니라 ‘우리’입니다. 이 기도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그날,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서로의 손을 잡고 아버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계획이 공동체 안에서 방해를 받을 것이라는 점을 예상하셨습니다. 공동체를 깨뜨리고 약화시키는 죄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셨어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비판입니다.

본문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잘 알고 있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신중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아무도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무비판적인 공동체를 만들라 그런 뜻이겠습니까?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에는 비판이 없을 것이 확실합니다. 거룩하고 사랑으로 충만한 공동체에 비판이 필요할 리가 없기 때문이죠. 그러나 지금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는 불완전해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가 공동체 안에 실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비판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요?

예를 들어 이단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이단이 교회에 들어와서 거짓 교훈으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때도 아무런 비판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이단의 미혹에 주의하라는 말씀이 곳곳에 있습니다. 이단에 미혹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들의 가르침을 분별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단의 가르침을 비판하여 그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교회를 지켜낸 성도들을 향해 잘 했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갈라디아서 6:1에 보면 어떤 사람이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으라”고 말씀이 있습니다. 죄 짓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지 말고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할 책임이 공동체 안에 있다는 거죠. 비판하는 일이 없이 범죄한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비판이 선행되어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실제로 갈라디아서 2장에 보면, 사도 바울도 이방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문제에 대하여 이중적인 행동을 했던 베드로를 비판했던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미워했기 때문이 아니라 외식이 교회 공동체 안에 퍼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도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27, 33).
비판의 강도가 얼마나 강한지 거의 저주를 퍼부으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정말 저주를 퍼부으신 것일까? 아닙니다. 그것은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받아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점들에 비추어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비판을 금지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거죠. 예수님께서 금지하신 것은 정당한 비판의 범위를 벗어나는 정죄와 판단입니다.

새번역성경은 1절 말씀을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라” 번역했고, 영어성경에서도 “Do not judge!”라고 번역했습니다. 비판과 심판은 무게감이 많이 다르죠. 우리의 죄를 정죄하고 심판하시는 일은 누가하는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죠.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뜻은 하나님처럼 다른 사람의 행동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인 겁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금하고 계신 판단 혹은 심판인가 아니면 정당한 비판인가? 사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비슷해요. 구분하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 비판의 동기입니다.
5절 말씀에 보면 “외식하는 자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앞부분에서 외식으로 구제하거나 기도하거나 금식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것들로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도 없고 경건에 이를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만 외식이 끼어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에도 외식이 끼어들 수 있다는 겁니다. 겉으로는 정당한 비판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정당하지 않은 동기가 숨어 있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비판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마치 판사처럼 행동했습니다. “이건 옳고 이건 그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비판하는 그들을 비판하셨습니다. 비판의 동기가 교만이라는 죄에서 나온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장면을 기억하시지요? 바리새인은 서서 손을 들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토색, 불의, 간음은 하나님의 율법의 어기는 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그런 죄를 짓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건가요? “나른 그런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달라. 더럽고 불결한 것들!” 다른 사람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정죄함으로써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하였을 때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방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이 잘 한 일인가? 아닙니다. 잘 못한 일이었습니다. 내용상으로 보면 미리암과 아론이 정당한 비판을 했다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이 잘 했다고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의 비판이 모세의 지도력을 무시하는 교만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정당한 부르지 않고 왜곡된 비판, 비방이라 불렀던 겁니다.

옳은 말하기 좋아하시지요? 그런데 옳은 말이라고 해서 관계와 공동체에 유익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용상으로 옳다고 하더라도 교만한 마음에서 나온 비판은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적대감을 품게 만들어요. 나는 옳은 이야기를 한다고 하는데 상대방에게는 그것이 비방으로, 무시하는 말로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잘못에 빠지지 않으려면 먼저 봐야 할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3, 4절).
실제로 눈에 들보를 넣고 다는 사람이야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인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씀인 거죠. 우리가 자신의 죄는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바라보는 눈은 밝은 존재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은 아주 크게 여기고 자신의 큰 잘못은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치명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입니다. 똑 같은 일을 두고도 입장이 바뀔 때 그것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한 적이 있으신가요? 솔직하게 잘 생각이 안 나시죠? 저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한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문제를 아주 사소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한 사소한 비판 혹은 비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하죠? 절대 잊어 먹지 않아요. 두고두고 이를 갑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문을 외우고 다니면서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넌 죄인, 넌 매국노 세리, 넌 더러운 창녀, 넌 상종 못할 인간, 넌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은 자. 이런 낙인을 찍어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겉은 깨끗한 것처럼 보이지만 안으로는 더러운 것들과 불법,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똑 같은 죄인이라는 거죠.

“나도 똑 같은 죄인이다. 내가 비판하는 사람과 내가 다를 것이 없다. 그들보다 더 큰 문제가 내 안에 있다.” 우리가 이것만 깨달아도 아마 대부분의 비판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만 찾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이대고 있는 율법이라는 잣대를 자신들에게는 들이대지 않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자신들을 판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앉아야 할 자리가 판사석이 아니라 피고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2절).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 우리도 똑 같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런 뜻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뜻을 가지고 있지만 이 말씀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그 기준으로 우리 역시 판단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2:1에서 똑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우리는 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그런데 진실은 뭔가요? 나 자신도 그들과 똑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는 거죠. 다른 사람을 향한 비판과 정죄가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나를 치게 될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서야할 자리는 판사석이 아니라 피고석에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피고의 자리에 섰을 때 누가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판단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우리를 판단하시겠죠. 그러나 우리의 죄를 가장 신랄하게 정죄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해서 쏟아냈던 비판과 정죄가 될 거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것은 우리가 하는 비판을 통해서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저주와 심판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받으셨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어디 나만을 위해서 십자를 지셨겠습니까? 우리가 비판하는 그 누군가를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신 거죠. 이것이 깨달아지고 믿어지면 비판의 동기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사랑과 용서를 받은 자의 눈으로 사람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당한 비판을 금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부당한 판단과 정당한 비판을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이것을 판가름하는 것은 결국 그 속에 사랑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뉴욕의 거리 전도자로 알려진 지용훈 목사님이 쓰신 <말씀으로 기도하라>는 책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를 위하여 울며 기도하지 않았다면 비판하지 말라.” 기도와 사랑이 없는 비판으로는 사람을 살릴 수도, 공동체를 세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죄를 신랄하게 비판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아, 독사의 새끼들아.”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바로 뒤에 보면 멸망당할 성읍과 그 속에 있는 완악한 사람들을 보시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부르며 우셨다고 하셨습니다.
금요성령집회 때 이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할 때 눈물이 터졌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눈물을 흘리시며 형편없는 제 이름을 부르고 계신 것 같이 느껴지셨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전에 섬기던 교회의 직원으로 섬기던 분을 만났습니다. 교회 직원으로 몇 년을 섬기시다가 다른 일을 하려고 사임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자신이 교회를 사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 전도사님이 만나자고 하더니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집사님은 교회에 있어야 할 사람인데 왜 교회를 그만두십니까? 반드시 심령이 상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좀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그런 말이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상처가 되지 않은 것은 전도사님이 그 야기를 할 때 2시간 동안을 거의 울면서 말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진로 문제로 고민되고 갈등이 되는 순간인데 전도사님의 그 말을 생각난다는 겁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안에서는 동성애 문제가 큰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동성애와 동성결혼은 비판하고 반대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죄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 안에 그들을 위한 기도와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비판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비판은 사람들에게 그저 비난과 비방으로 들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선교초기에 감리교 선교사님 중에 로버트 하디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원산에서 의료선교사로서 선교활동을 하며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기대했던 것만큼 열매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신자들은 주일예배에 잘 참석하지도 않았고 도덕적으로, 성적으로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공금을 횡령하는 일도 있어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성찬을 금하고 교회에서 제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 안에 회개의 열매는 도무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절망하여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여선교사 모임에서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해달라는 부탁을 받게 됩니다. 그는 모임을 인도하던 중 “네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성령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는 한 선교사의 질문에 대답하며 자신의 죄를 드러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씻지 않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자고, 먹고, 심지어는 화장실도 없습니다. 저는 그들을 위해 제 물질과 심지어는 입고 있는 옷까지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조롱하였습니다. 무식한 민족입니다. 그들은 절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땅은 망할 것입니다. 저는 조선을 증오합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역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였습니다. 제 사역 가운데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죄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내가 이 땅을 사랑한다. 그것 하나면 되지 않느냐. 너는 무엇이 더 필요하냐!”
“주님, 제가 교만했습니다. 제가 사랑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핵심이었던 겁니다. 하디 선교사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자 다른 선교사들과 성도들의 회개가 봇물 터지듯이 터졌어요. 그가 그토록 보기 원했던 회개의 열매가 맺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하디 선교사는 쌀쌀 맞은 의사였지만 은혜를 받은 후에 성품과 인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차라리 아픈 것이 더 낫다며 하디에게 치료 받기를 주저하던 환자들이 은혜를 받은 후에는 그의 손만 만져도 병이 나았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사랑의 사람으로 바꾸신 것이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으로 말하라는 뜻입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와라
존귀한 주의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임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와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여러분은 형제와 자매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십니까? 그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과 눈물을 보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십시다.

이제 성찬을 받겠습니다. 성찬보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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