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이 믿을만한 증거, 부활(사도행전 17:30-31)

모든 사람이 믿을만한 증거, 부활
사도행전 17:30-31

2019년 4월 21일

○ 모든 사람이 믿을만한 증거, 부활 / 사도행전 17:30-31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십자가 표시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본당 안에서 십자가 표시를 한 번 찾아보세요. 강단 위에도, 강대상에도, 헌금함에도, 봉헌대에도. 십자가가 우리의 믿음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금요일예배 때 말씀드린 것처럼 십자가는 그 자체로는 죽음과 절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죽음과 절망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의 십자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패배처럼 보이는 십자가를 승리와 영광의 십자가라고 부르는 것은 다름 아닌, 부활의 아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다 할 때 거기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결코 믿음의 곁가지가 아니에요. 기독교의 믿음은 온통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기초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고는 복음을 믿는다고 할 수도 없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십니까? 그 믿음에 흔들림이 없으신가요?

불신자들도 예수님께서 역사적 인물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과 가르침이 훌륭한 것이었다고 동의하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4대 성인 중 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거죠.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변에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다.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으실 겁니다. 혹시 우리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상한 게 아닙니다. 부활은 믿기 어려운 사실인 게 맞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에 어긋나는 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죽은 사람이 부활한 일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상식에 벗어나는 일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믿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믿음에 의지하여 살고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겁니다.

누군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죽은 사람이 부활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느냐?” 그렇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냥 믿는 거야! 믿으라면 믿어!” 제일 한심하고 상대하기 힘든 사람들이 무조건 우기는 사람이에요. 맹목적인 믿음은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될 뿐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결코 맹목적인 것이 아닙니다.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아덴에 가서 전도할 때 사람들에게 한 말입니다. 그리스 아테네는 철학과 이성적인 사고가 발달한 지역이었습니다. 철학적이고 이성적인 사람들에게 부활의 복음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31절).
부활에는 믿을만한 증거가 있다는 것이고, 부활은 하나님께서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증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우리 중에 세종대왕을 눈으로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실존 인물이었다는 사실과 그분이 한글을 창제하셨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눈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믿을만한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왕조실록을 비롯한 역사적인 기록, 그리고 우리가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한글이라는 증거가 있기 때문인 거죠.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도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증거는 무엇이겠습니까? 여러 가지 증거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는 빈 무덤의 종교라고 말했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만약 일요일 아침에 무덤이 비어 있지 않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 찔린 시신이 무덤 안에 그대로 있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는 아예 생겨나지도 못했을 겁니다. 무덤에 시신이 그대로 있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했다고 주장하며 선포한들 그것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말입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 간 것은 아닐까? 그렇게 의심해 볼 수도 있겠죠. 실제로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런 소문이 돌았다는 것을 보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덤이 비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소문이 돌 수 있겠습니까?

무덤이 비었다고 곧 바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믿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아요. 부활이 아니고도 무덤이 빌 수 있는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두 번째 증거가 있어요. 그것은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사람들은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들에 의해서 부활의 소식이 퍼져 나갔습니다. 만약 부활의 이야기가 누군가에 의해서 꾸며진 것이라면 절대로 여자를 목격자로 내세우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당시 여자들은 사회적인 지위가 매우 낮았기 때문에 여자들의 증언을 신빙성 있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이 여자들이 부활의 최초 목격자로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그게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여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 외에도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고전 15:4-7).
몇몇 사람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한다면 그들이 환상을 보았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습니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염원하면 환상을 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보세요. 제자들뿐만 아니라 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제로 만났습니다. 그것도 따로따로 만난 것이 아니라 일시에 만났다는 겁니다.

500명 넘는 사람들이 동시에 환상을 보거나 집단 망상에 빠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이 글을 쓸 당이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 중 대다수가 살아 있었다는 겁니다. 부활이 의심스럽다면 그들에게 가서 물어보라. 그런 뜻이 담겨 있는 거죠.

지금 우리는 단 몇 사람의 증인만 있어도 그것을 사실로 여기고 그것에 의하여 유무죄 판결을 내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증인이 있다? 그것이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라 할지라도 신뢰할만한 가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세 번째는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 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부인하기도 하지요. 복음서에는 제자들의 나약함과 실패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후에 그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상식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가 제자들 안에 일어나요. 아직도 예수님을 죽인 자들의 권세와 살기가 등등한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담대하게 전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압도된 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천 명씩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로 교회가 생긴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을 때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시신을 숨겨두고 부활했다고 입을 맞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있을 수 있어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실을 속이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정치계 인물 중에 찰스 콜슨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20년 동안 미국 대통령의 법률 고문으로 일한 사람입니다. 월스트리트 저널이라는 잡는 그 사람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찰스 콜슨은 자기 어머니나 할머니의 시체를 바꿔서라도 끝까지 유능하게 맡은 일을 해낼 사람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가 맡은 일은 해내고야 마는 그런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라는 거죠. 그런데 그가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닉슨 대통령이 부정한 일을 저지르고 궁지에 몰렸을 때 찰스 콜슨과 몇몇 사람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그것을 은폐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완벽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불과 18일 만에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지키려고 한 것이 정교하기는 했지만 거짓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은 상식 밖의 일이었고, 사람들의 이목을 주목시키기에 충분한 메시지였습니다. 그것을 의심하고 부정하고 공격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만약 부활이 조작된 메시지였다면 결국 그 실체가 드러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부활의 메시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성도들이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기쁘게 말입니다. 우리 중에 거짓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 보세요. 혹시 한 두 사람이라면 정신이상자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벌어진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피로 시작되었고, 부활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순교의 피가 뿌려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부활이 진리라는 사실이 죽음으로써 증거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성경에서 증언하는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다 진리라는 것을 말해요. 로마서 1장 4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부활로써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만천하에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것과 그분의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것도 사실로 드러난 거고요. 천국과 지옥이 있음도, 그리고 마지막 때 최후 심판과 몸의 부활이 있음도 다 사실로 드러난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고 따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합당한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주님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큰 스승 정도라면 그분께 모든 것을 걸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유교는 공자에게 모든 것을 걸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그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말할 뿐입니다. 불교에서도 석가모니에게 모든 것을 걸라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석가모니처럼 도를 깨우치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걸라고 요구합니다. 그분을 인격과 삶의 중심에 모셔드리라. 삶의 기초를 그분 위에 두라고 요구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면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것을 걸어야 맞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럴 때 우리고 객관적인 진리가 내 삶을 구원하고 변화시키는 진리로 경험되어질 수 있는 겁니다.

대학생선교회의 지도자인 조쉬 맥도웰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로부터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상처와 증오로 똘똘 뭉친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학2학년 때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도전 한 가지를 받습니다. 그는 여러 학생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다가 유난히 삶의 모습이 다른 그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중 한 여학생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습니다.
“무엇이 당신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까?” 그 여학생은 이렇게 분명히 대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요!” “오, 제발 그런 쓰레기 같은 말은 하지 마세요. .... 나는 교회, 성경, 그리고 종교라는 말만 들어도 넌덜머리가 난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종교를 말씀드린 것이 아니에요.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 드렸어요.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말이에요.”

그녀의 말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도전을 받아들이고 빠른 시간 내에 싸움에서 승리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반박하는 열쇠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있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는 부활이 허구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철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연구를 통해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증거들을 살피며 집중적으로 연구한 그는 단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건 진리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상 가장 확고한 사실 중 하나라는 사실이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씨름이 벌어졌습니다. 갈등하며 밤을 지새운 조쉬는 결국 예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삶 가운데 들어오셔서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자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에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 아버지를 용서하게 된 것입니다. 내주하시는 예수님의 강권하심으로 아버지를 찾아가 “아버지,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해요. 아버지가 울며 묻습니다. “너는 어떻게 나 같은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니? 예수님이 내 인생 가운데 행하신 일을 내 인생 가운데서도 하실 수 있다면 나도 그분을 알고 싶구나!” 아들의 변화를 본 아버지도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담은 책이 바로 <회의에서 확신으로>라는 책입니다.

회의론자였던 그는 지금 그 누구보다 확신에 찬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부활>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로마의 군인, 호민관의 시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그린 영화입니다. 호민관은 예수님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소문의 진위여부를 조사하다가 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인상 깊은 장면이 기억나는 게 있습니다.
“예수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소문이 사실입니까?”
“분명한 사실은.... 나는 이제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나는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여러분의 고백이신가요? 그렇다면 여러분도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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