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특별집회_흔들리지 않는 소망(정한영 목사)(히브리서 2:14-18)

고난주간특별집회_흔들리지 않는 소망(정한영 목사)
히브리서 2:14-18

○ 흔들리지 않는 소망 / 히브리서 2:14-18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우리는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성금요예배로 모였습니다. 고난주간특별집회를 진행하면서 분위기가 꼭 잔치집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주간의 분위기가 초상집 같지 아니하고 잔치집 분위기 같은 것에 감사합니다. 고난, 죽음만 생각하면 슬퍼해야 마땅하지만 그 고난이 우리에게 구원과 승리가 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고난주간과 성금요일을 우울하게 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도 초상집 같이 아니하고 잔치집 분위기 같기를 바라신다고 믿습니다.

며칠 전에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다가 한동안 잊고 있었던 노래를 듣게 되었습니다. 80년대 후반에 나온 노래인데요. 정수라 씨가 부른 <아 대한민국>이라는 노래입니다.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고 강물엔 유람선이 떠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뚜렷한 사계절이 있기에 볼수록 정이 드는 산과 들
우리의 마음속에 이상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
이렇게 우린 은혜로운 이 땅을 위해
이렇게 우린 이 강산을 노래 부르네
아아 우리 대한민국 아아 우리 조국
아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우리 대한민국 아아 우리 조국
아아 영원토록 사랑하리라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한 생각이 듭니다. 이 가사에 동의할까? 아, 대한민국은커녕 헬조선이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이 정도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안정된 나라도 없는데 자신이 사는 나라를 헬조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들과 우리 자신의 현실이 이 노래와 같지 않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뜻하는 것은 무엇이건 될 수가 있어!” 대단히 희망적인 가사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 가사와 거리가 멀어요.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서 소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고, 생활은 말할 수 없이 편리해지고 있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힘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힘들어서 죽는 것은 아니에요. 사실은 마음에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죽는 겁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에 희망이 있으면 결코 죽지 않습니다.

빅터 프랭클이라는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2차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 가 쓴 책 제목이 <죽음의 수용소에서>입니다. 말 그대로 죽음이 즐비한 수용소에서 그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가 제시한 삶의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지옥 같은 삶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겁니다.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해요.
“어떤 마음 자세를 갖는가는 내 선택에 달린 일임을 난 항상 기억하고 있었다. 난 절망을 선택할 수도 있고 희망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희망을 선택하기 위해선 내가 간절히 원하는 어떤 것에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난 내 아내의 손에 생각을 집중했다. 그 손을 한번만 더 잡아보고 싶었다. 한번만 더 아내의 눈을 바라보고 싶었다. 우리가 한번 만 더 껴안을 수 있고, 가슴과 가슴을 맞댈 수 있기를 난 간절히 원했다. 그것이 내 생명을 1초 1초 연장시켜 주었다.”
빅터 프랭클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선택했고 결국 살아남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배운 희망의 중요성을 일생 동안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가 쓴 책은 다 희망과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책들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수용소에 갇힌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의 삶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고난과 고통거리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게 뭐죠? 삶의 의미와 희망입니다. 건강을 잃은 사람에게는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지긋지긋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생활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불행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은 깨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 역시 그럴 수 있는 겁니다. 희망이 있으면 살 수 있고,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희망은 선택이라 했으니 여러분도 어떤 상황 속에 있더라도 희망을 선택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는 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희망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앞에 가장 큰 절망이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죽음이라는 절망입니다.

우리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나도 언젠간 죽겠지.” 이런 정도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은 그 어느 것보다도 분명하고 강력한 현실입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힘겨운 문제들이 있습니다. 질병과 사고, 재정적인 문제. 특별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문제를 만나기도 합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상황이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하죠.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 죽음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면 한순간에 우리가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문제들이 아무것도 아닌 문제들로 변해버리고 맙니다. 죽음이라는 강력한 문제가 모든 문제를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우리의 삶에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게 돈 문제죠. 돈 때문에 고민하고 염려하고, 심지어 갈등하고 다투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일 죽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돈이 없다는 것이 걱정거리가 될까? 좋은 직장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될까? 평소에는 그렇게 우리를 근심하게 하고 괴롭히는 문제가 죽음 앞에 서면 한 순간에 신경 쓸 것이 없는 문제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염려하십니까?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다르게 말해서 여러분에게는 어떤 희망이 필요하신가요?
15절 말씀을 보면 모든 인생을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라는 겁니다.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죽음은 터부입니다. 부정하게 생각하고 멀리하는 대상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기를 쓰고 멀리 하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죽음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죽음으로 모든 관계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지옥 같은 삶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한 데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희망, 그 삶의 의미가 어디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관계 속에서 나왔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데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난 내 아내의 손에 생각을 집중했다. 그 손을 한번만 더 잡아보고 싶었다. 한번만 더 아내의 눈을 바라보고 싶었다. 우리가 한번 만 더 껴안을 수 있고, 가슴과 가슴을 맞댈 수 있기를 난 간절히 원했다. 그것이 내 생명을 1초 1초 연장시켜 주었다.”

사람은 삶의 의미가 있어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은 관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는 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있는 겁니다. 돈 버는 거 쉬운 일 아니죠? 사실 고생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 고생스러운 일을 포기하지 않는 것인가요?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음은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관계들을 하나씩 잘라내기 시작해서, 결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만듭니다. 관계라는 문제에 있어서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품을 수 없게 만듭니다.

얼마 전에 세월호와 관련된 영화 하나가 나왔습니다. 영화를 보고 일년치 울 것을 다 울고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심정이 정도라면 당사자인 가족들은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그런데 가족들과 우리를 그렇게 울게 만드는 그 고통의 핵심이 뭔가요? 사랑하는 내 아들, 사랑하는 내 딸을 더 이상은 만날 수도 없고, 그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그들을 다시 품에 안을 수도 없다는. 말하자면 사랑과 관계의 절망, 그것의 고통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삶에 어렵고 힘들 일이 있지만 대부분은 견디다 보면 어떻게든 지나갑니다. 지나고 보면 어렵고 힘들었던 일들이 오히려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도 하죠. 그러나 죽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사랑하는 가족과 사별한 경험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사별의 고통이 추억이 될까? 그렇지 않아요. 시간이 흐르면 상처가 흐려지기는 하지만 사별의 아픔은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과 관계의 절망을 경험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절망을 안겨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두려움의 실체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두 번째 이유는 죽음 이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죽으면 아무것도 모른다. 사후 세계는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 할 수 있지요?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무슨 근거로 믿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되묻고 싶습니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그런 생각은 하나의 믿음이고 종교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단순히 목숨이 끊어지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차를 시속 100km로 운전하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그 뒤를 내다볼 수 없다면 그것은 두려운 일일 수밖에 없는 거죠.

크리스퍼 히친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투적인 무신론자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종교적 망상에서 사람들을 벗어나게 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종교에서 자유로워져야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식도암에 걸려서 60대 초반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소멸했습니다. 그가 투병 중에 쓴 짧은 메모들이 책으로 나왔는데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입니다. 그런데 원제는 <Mortality>,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존재라는 책입니다.
그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 있음을 느끼게 것은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쓰는 것과 그리고 그 생각을 강연과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암세포가 퍼져서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 없을까봐 두려워했습니다.
“목소리가 사라질 까봐 걱정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지금 손이 죽어버려서 나를 글쓰기를 못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 나의 인격과 정체성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암과의 고통스럽고 외로운 싸움 속에서 가장 큰 위안을 주는 것은 그의 곁을 지켜주는 사랑하는 아내와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이 쇠약해지는 것보다 자신의 목소리를 잃는 것을 더 아파했고, 더 이상 가족, 친구들과 음식과 술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습니다.
그는 전투적인 무신론을 외쳤지만 죽음의 문턱 앞에서 흔들립니다. “내가 종교에 귀의한다면 그것은 무린론자의 죽음보다 신자의 죽음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무신론자로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형식적으로는 무신론자로서의 지조를 지킨 것이지만, 그 믿음이 그를 두려움에서 건져주지 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유시민 씨를 아시죠? 유시민 씨 역시 무신론자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삶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는 책이지만 내용에는 죽음에 관한 부분이 많아요. 그는 죽음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나는 왜 자살하지 않고 오늘도 살고 있는가?”라고 말한다.
“삶의 모든 순간은 죽음이라는 운명과 대비할 때 제대로 의미를 드러낸다.”
“인생은 소망을 하나씩 지워내는 냉혹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삶에는 끝이 있다. 지금 존재하는 것은 머지않아 모두 스러지고 망각된다. 인생은 헛되다, 아무렇게나 살면 되지, 어떻게 살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기쁜 삶,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삶의 유한성과 관련한 허무의식을 이겨내야 한다.”
유시민 씨는 기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허무의식을 이겨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 허무의식을 이겨낼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지금 존재하는 것이 머지않아 스러지고 망각되는 날이 올 터인데, 소망이 하나씩 사라지다 결국 모든 소망이 삭제되는 날이 올 터인데, 어떻게 허무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그 대답은 없어요.

유시민 씨가 노회찬 의원이 죽었을 때 조사를 했습니다. 자신은 아직도 믿지 않지만 다음 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잘가요 회찬이 형, 우리 다음 생에서 또 만나요.”
무신론자의 조사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딘가 어색한 구석이 있죠.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서 그래도 삶의 의미와 희망을 찾으려고 했을 때, 그도 다음 생을 언급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희망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희망에 관한 진실은 그겁니다. 죽음 이후를 내다보지 못하는 한 그 어디에도 희망은 없다는 겁니다.

“어려운 상황이 바뀔 것이다. 일이 잘 될 것이다. 행복한 날이 올 것이다.” 이런 희망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죽음이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에게는 그것보다 더 깊은 희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희망이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성금요일에 할 수 있는 대답은 “네 그렇습니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당하고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피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피하겠지만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당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죽음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발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선택하는 것처럼 그분도 고난과 죽음을 선택하신 겁니다.

복음주의 신학자인 존 스토트가 아시아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가 절에 가서 불상을 본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불상 앞에 서니 경외감이 들더래요. 가부좌를 틀고 앉아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고 세상의 번뇌에 대하여 초연한 표정을 지은 부처상. 그렇죠? 그런데 부처상을 보면서 갑자기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외롭고 뒤틀리고 처절한 고문을 당하신 분,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옷은 찢어지고, 사지는 비틀어지고, 이마에는 가시가 찔러 피가 흐르고, 입술은 말라 갈증을 견딜 수 없었고,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신 분. 그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이셨다는 겁니다.

왜 하필 예수님께서는 이 처절한 고통과 죽음을 선택하신 것일까?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를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14, 15절).
한마디로 죽음의 두려움에 매인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시기 위하여, 죽음의 두려움을 제거하시고 새로운 희망을 주시기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다는 겁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죽음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멸하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죽음 뒤에는 그것을 쥐고 흔드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고 마귀입니다. 그런데 그 권세를 무엇으로 꺾으셨는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통하여 죄와 죽음의 권세를 꺾으셨다는 거예요.

17절 말씀에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목적 없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대신하기 위하여 그리하신 겁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면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죽음이 아주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에 아주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있습니다. 군병들에게 채찍질 당하시고 몽둥이로 맞아서 쓰러지시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쓰러지시자 군병들도 채찍질을 멈추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손을 바들바들 떠시면서 기어이 다시 일어나세요. 마치 자신을 다시 때려달라. 그렇게 요구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장면을 보시겠습니다.

(영상시청)

예수님께서는 왜 바보처럼 다시 채찍을 맞으신 것일까요? 죄로 인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남김없이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 자기 생명을 완전히 쏟으신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완전히 받아내시기 위함이었던 겁니다. 그리하여 이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십자가는 그 자체로서는 죽음이고 절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십자가를 통하여 죽음의 권세를 꺾으시고, 절망의 십자가를 통하여 절망을 꺾으셨습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해주신 겁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죽음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끊어진 곳곳에 다리를 놓아주셨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어주셨고, 그러므로 죽음을 종착역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죽음으로 잃어버린 관계,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이어주셨습니다.

팀켈러 목사님이 쓰신 <고통에 답하다>라는 책에 메리라는 여자 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삶의 여정에서 수없이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부모님의 이혼, 남편의 폭력, 아버지의 성폭행, 자신의 뇌종양, 큰 아들이 감옥에 들어가는 일, 그리고 재혼한 남편의 뇌출혈. 그녀는 고난을 통과하면서 깨달은 진리를 이렇게 썼습니다.

“삶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날 변화시키셨다. ... 삶이 늘 지금 같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마음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그만두고 언젠가 그 아픔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거둬 가실 분께 시선을 둘 수 있다는 데서 큰 위안을 얻는다. 평생 절망에서 벗어나 소망으로 들어갈 비결을 찾아 헤맸지만 어디서도 구하지 못했다. 소망은 무슨 일을 하거나 하지 않는데서 비롯되지 않았다. 문제의 해결에서 오는 게 아니라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단 한 분,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는 데서 시작된다.”

고난주간특별집회 첫째 날 강사로 오신 이시선 교수님.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 치료를 받는 과정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서 주님 왜 나를 살려주셨나요? 나를 향한 계획은 무엇인가요? 물었지만 아무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주일 예배 시간에 목사님이 오셔서 “사랑하는 딸아”라고 부르시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내가 너를 세상 가운데 다시 세울 것이고, 병들고 약한 자에게 희망이 되리라.” 그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일본에 가서 수술을 받을 때 너무 힘들어서 주님께서 일본에는 오지 않으셨는가보다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병원 창문으로 밖을 보는데, 파란 하늘에 창문틀이 선명하게 십자가를 만들어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주님은 여기도 함께 계신다”라는 사실이 믿어졌습니다. 마음이 회복되고 믿음이 회복되었습니다. 살아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지금은 모든 고난과 고통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고난 받고 약한 자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자로 살고 있음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사랑하는 딸아”, “사랑하는 아들아”라고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고통 받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죽음의 절망을 안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장엄한 선포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희망입니다. 세상은 사라질 것이지만 십자가는 영원한 희망으로 우리 가운데 우뚝 서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안에서 사십시다. 오직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으로 삼고 삼으십시다. 그러면 그 어떤 절망도 우리를 꺼꾸러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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